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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줄이고, 요금 단순하게… '똑똑한 정보'가 지갑 연다

양용현 2017/09/25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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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줄이고, 요금 단순하게… '똑똑한 정보'가 지갑 연다

양용현 KDI 규제연구센터 제도연구실장

 

행동경제학은 경제학의 한 분야로, 간단한 변화를 줘서 사람들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낯설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 생활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횡단보도나 계단에 우측통행을 하라는 화살표를 그려놓은 것이 쉬운 예입니다. 보행자에게 우측통행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회규범은 아니지만 이를 지키면 혼잡할 때도 순조롭게 길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우측통행을 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우측통행을 하라고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 화살표를 그려놓는 게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 더 효과적입니다.

 

인류는 이를 오래전부터 체득해왔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규범으로 만들어 지키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을 중요한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 영국이 가장 먼저 행동경제학을 정책에 접목

 

가장 먼저 행동경제학을 체계적으로 정책에 접목하기 시작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영국에서는 지난 2010년에 '행동경제학팀'이라는 조직을 정부 안에 만들었습니다. 정책에 행동경제학을 반영하기 위해서죠. 이 조직은 현재 정부에서 독립해 공익목적회사가 됐습니다. 올해까지 150건이 넘는 실험을 통해 정책의 효과성을 높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장기기증 등록을 유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실험한 것입니다. 좀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장기기증을 받기 위해 영국 정부는 정부 홈페이지에서 장기기증 등록을 받는 방안을 고려했습니다. 보통은 홈페이지 첫 화면 구석에 '장기기증 등록'이라는 글자가 쓰인 배너를 배치해 버리고 끝내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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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행동경제학팀은 장기기증 등록을 유도하는 시점, 위치뿐만 아니라 메시지에 따라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실험을 통해 발견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자동차세를 내거나 운전면허를 갱신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납부 절차, 갱신 절차가 완료되면 장기기증 등록을 유도하는 메시지를 보여줬습니다. 8가지의 서로 다른 메시지 가운데 무작위로 메시지를 골랐습니다. 놀랍게도 어떤 메시지를 보여주는지에 따라 효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는 '당신이 장기이식이 필요할 때 받을 의향이 있다면, 동참해주세요'였습니다. 또 '이 화면을 보고 매일 수천 명이 장기기증 등록을 한다'는 메시지도 효과적이었습니다. 이 같은 메시지를 다른 홈페이지에도 모두 적용한다면 단순히 등록하라고 하는 것보다 연간 9만6000명이 더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영국에선 1인 가구에 대해 주민세를 깎아 주는데 납세자가 자발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면 1인 가구라고 거짓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영국 행동경제학팀은 응답지 순서를 바꿔봤습니다. '나는 사실만을 답하겠다'는 문구를 응답지 윗부분에 배치해 서명토록 했더니 거짓 응답이 줄었습니다. 또 세금 할인에 대한 안내를 눈에 덜 띄게, 거짓 응답에 대한 벌칙을 눈에 잘 띄게 하고, 벌칙 사례를 소개했더니 효과가 더 컸습니다.

 

◇ 소요전력량 대신 예상 전기요금 표기하면 소비자가 쉽게 선택

흥미로운 사례는 다른 나라에도 있습니다. 미국도 영국과 유사한 시기에 행동경제학을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4년 '사회·행동과학팀'이란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보다 5년 전에 행동경제학 전문가인 카스 선스타인(Sunstein)을 정부에 영입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몇 가지 흥미로운 정책이 시행됐는데 두 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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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자동차 연비를 표시하는 방법에 변화를 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연비를 리터당 주행할 수 있는 킬로미터(㎞/L)로 표시하듯 미국도 기존에는 갤런당 마일(mpg)로만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 이 정보는 유용하지 않습니다. 연비가 좋아질 때 유류비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계산하려면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즉 여러 차종을 비교할 때 유류비의 차이를 고려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2011년 미국은 새로운 연비 표시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앞으로 5년간 유류비 절감액의 예상치 등을 추가로 표시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컨대 연비가 26mpg라고 하면서 앞으로 5년간 1850달러의 유류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추가로 표기하는 겁니다.

 

이와 유사한 정책이 가전제품에도 시행됐습니다. 기존엔 '100kWh'처럼 소요전력량만 표시돼 있었는데 그것만으론 전기요금을 얼마나 절약할 수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2008년부터 대부분의 가전제품에 연간 예상되는 전기요금과 함께 경쟁 제품의 예상 전기요금 최대치와 최소치를 표시하도록 하는 표시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이렇게 알기 쉽게 표기를 하면 소비자들이 제품을 선택할 때 에너지 절약형 제품에 쉽게 손이 가게 되고 기업들도 에너지 절약형 제품을 더 생산할 유인이 생깁니다.

 

◇ 우리나라도 식품 표시 등에 활용 고려해야

행동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어떤 표시 방법이 더 정보를 잘 전달하는지 찾기 위해 심층 인터뷰와 가상구매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정보를 담는지, 무엇을 더 눈에 띄게 배치하는지에 따라 제품의 특성 차이를 이해하는 소비자의 수가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정책을 도입해볼 수 있을 겁니다. 식품에 표시되는 정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올해 2월부터 새로운 식품표시 시범사업이 시작되면서 좀 더 정보를 이해하기가 쉬워졌지만, 여전히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이 경우 꼭 필요한 정보만 남기고 나머지는 홈페이지에 기재하는 게 정보 전달에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 핵심 설명서는 이러한 방식을 도입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소비자들은 핵심적인 내용만 담은 한 장짜리 설명서를 긴 약관보다 많이 읽을 겁니다.

 

행동경제학은 정책 효과를 높이는 데 활용될 수 있습니다. 행동경제학을 정책에 활용하는 정부 조직을 만드는 나라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호주는 2016년에, 캐나다 온타리오주 정부는 2014년에 행동경제학팀을 만들었습니다. 행동경제학을 정책과 연계시키는 데 관심을 두는 비정부단체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행동경제학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드는 조직을 볼 수 있을까요?

 

너무 많은 선택지·너무 많은 정보가 합리적 선택을 방해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분석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은 기존 경제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은 인간을 매우 합리적인 존재로 보고, 비합리적 행동이 있을 수 없다고 전제합니다. 이에 반해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에도 한계가 있어 비합리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간주합니다.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정보에 대한 관점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선택할 수 있는 메뉴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부정합니다. 너무 많은 정보, 너무 많은 선택지는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을 방해합니다. 정확한 판단이 어려워지거나 후회하게 될까 봐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현상 유지를 선호하게 됩니다. 대신 꼭 필요한 정보 위주로 단순하게 전달하라고 주문합니다. 요금 체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메뉴를 줄이도록 권장합니다. 중요한 수수료율 정보는 반드시 눈에 띄게 표시하도록 요구합니다. 정보 생산자가 만들기 쉬운 방식이 아닌 소비자가 알기 쉬운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활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알려주고, 스스로에게 선서를 하도록 하고, 특정 행동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판단에 영향을 줍니다. 또 어느 시점, 어느 위치,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지 하나하나가 행동경제학의 분석 대상입니다. 기존 경제학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까지 탐구합니다.

 

이처럼 행동경제학은 사람들의 실제 행동 패턴을 연구하고 이를 활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지과학, 심리학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기존 경제학이 사람의 인지능력이나 심리를 간과해서 문제 해결에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행동경제학이 이를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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