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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규제개혁으로 혁신의 창 크게 열어젖혀야 (29면)

이수일 2018/01/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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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규제개혁으로 혁신의 창 크게 열어젖혀야

이수일 KDI 규제연구센터 소장

 

의료기기와 통신기기 경계에서 국내 출시가 거부된 당뇨폰, 자동차와 건설기계 사이에 끼여 4년을 허송한 트럭지게차는 융·복합을 인정하지 않아 사장되거나 희생된 혁신제품의 사례다. 자기 부처의 소관 규제에만 집착하는 칸막이 행정은 이처럼 혁신이 자유롭게 발현되는 시장환경 조성을 가로막는다.

 

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청와대 규제혁신 토론회에서 거론된 ‘3륜 전기 자동차’도 카테고리가 없어 출시가 지연됐던 사례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존 법령에서 금지해도 시장에서 상품화가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도록 최소한 시범사업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말했다. 근거 규정이 있어야만 사업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재검토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현재 요구되는 규제개혁에는 틀을 깨는 과감한 접근이 필요하다.

 

요즘 규제개혁의 맥락은 과거와 많이 다르다. 규제는 특정한 사회적 위험을 관리·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도입된 것인데, 우리나라 규제는 대부분 칸막이 규제, 사전(事前) 규제다. 사회가 안정되고 융·복합 현상도 드물었던 과거에는 칸막이·사전 규제도 별문제가 없었다. 이 시기 규제개혁은 건별로 검토해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기술·산업이 급속히 변화하고 융·복합이 활발히 전개되며 복잡성이 증가하는 환경에서는 과거 규제방식의 불합리성이 크게 불거진다. 규제로 관리해야 할 위험이 여러 부처에 걸칠 뿐만 아니라, 그런 위험을 미리 식별하거나 효과적인 통제 수단을 찾기도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건별 접근보다 칸막이 극복과 규제 기관의 유연한 법규 해석을 유도하는 제도 마련과 사전 규제에서 사후(事後) 규제로의 전환 등 메타적인 접근방식이 더 중요해진다.

 

규제개혁이 안 되는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규제 개선에 대한 공무원의 소극적이고 경직적인 태도, 기득권 집단의 반발을 들 수 있다. 나중에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사회의 우려도 사후 규제로의 전환을 더디게 한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먼저, 공직사회의 적극적인 행정을 유도하는 행정 거버넌스 구축이라는 ‘넛지’가 필요하다. 지난 정부의 ‘규제개혁신문고’가 좋은 사례다. 규제개혁신문고는 2014년 3월부터 2016년 말까지 3850건의 건의를 수용했다. 이 가운데 35%는 법규 개정 없이 단지 기존 법규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규제 건의가 접수되면 14일 이내에 소관 부처의 담당 국·과장이 실명으로 답변하고, 답변이 미진할 경우에는 소관 부처의 1급 실장이 실명으로 소명하도록 한 제도 설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아무리 소극적인 공무원이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감사원의 ‘적극행정 면책제도’가 효과적으로 운영됐더라면 성과가 훨씬 컸을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를 법률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보통신융합특별법을 제·개정하기로 한 것도 옳은 방향이다. 규제 샌드박스와 같은 시범사업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시범사업은 새로운 기술과 제품, 서비스가 기존 규제와 충돌하는 경우에 제한된 공간에서 다양한 조건 하에 해당 기술의 시장 출시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떠한 부작용이 발생하는지 관찰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해당 기술의 시장 출시를 허용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혹시 모를 부작용과 그에 따른 여론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공무원에게 시범사업은 안전한 규제 개선 채널이 된다. 또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때문에 사회가 사후 규제를 꺼릴 경우에도 일단 제한적이나마 시장진입을 허용하는 시범사업은 사후 규제의 훌륭한 대안이 된다. 이론만 따지면서 부작용을 강조하며 규제 개선에 반대하는 이해관계자 집단을 극복하는 데에도 시범사업이 도움된다.

 

사실 지금까지 규제개혁이 부진한 근본 원인은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에 대한 안이한 인식에 있을 수 있다. 최근 중국의 전방위적인 굴기(崛起)를 보고 있노라면 고효율의 일본과 저비용의 중국 사이에 한국경제가 끼어있다는 샌드위치론도 어쩌면 흘러간 좋은 시절의 얘기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주력 제조업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는 이미 사라졌거나 빠른 시일 내에 사라질 것이라는 견해가 중론이다. 미래 경쟁력의 근간이 될 과학기술·인공지능에서 이미 중국은 우리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우리 상황이 1, 2년을 허투루 보내도 될 만큼 한가한 시절은 절대 아니다. 긴장감을 갖고 속도감 있는 규제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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