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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ːangle - KDI만의 새로운 시선 디지털 바람을 맞으며

2022 SPRING VOL.52

이창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나는 경제사를 전공했다. ‘역사경제중 상대적으로 후자에 비중을 두는 학문이며, 대부분의 교수들이 역사학과보다는 경제학과에 재직한다. 과거의 데이터를 활용해 경제이론을 검증하고, 현재의 문제해결 실마리를 찾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을 조명하고, 자료수집을 위해 각종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고 한 땀 한 땀 숫자와 문자들을 입력하는 것은 여느 역사학자와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대공황 시기의 미국 공장들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기 위해 워싱턴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몇 달간 머무르며 문서를 스캔하고, 숫자를 입력하던 경험이 있다. 다른 친구들은 근사한 모형과 실증분석으로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나는 단순 자료 입력을 하자니, 이게 뭐 하는 일인가 싶으면서도 나름 과거 보물에 파묻힌 듯 역사학자의 로망을 실현하는 순간이 아닌가 스스로를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처럼 로망 가득한 역사 연구에도 디지털의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도 강하게. 자료 입력을 자동화하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구글과 미국 대학들은 여러 고문서들을 스캔하여 PDF 전자책으로 만드는 일을 십수 년 전 시작했고, 이제는 그 이미지를 분석 가능한 형태로 바꿔놓는 일도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통해 쉽게 할 수 있게 됐다. 3인지 9인지, e인지 c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고민하던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손쉽게 입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일이 손으로 산업, 지역 등을 분류하던 일 역시 자동화된 방법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 연구의 디지털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궁금증인 세대 간 불평등, 사회적 이동성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직업과 소득이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미국의 인구센서스는 조사 원자료를 일찌감치 제공해왔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주민등록번호 등이 없어 이름과 지역, 나이 등을 활용해서 서로 다른 두 센서스의 유사한 사람이 동일한 인물인지를 일일이 파악해야 했다. 기계학습의 힘은 여기에도 미친다. 과거에는 어떤 규칙들을 일일이 지정해줘야 할 수 있었던 일이, 이제는 패턴 인식의 힘으로 손쉽게 가능해졌다. 동일한 군의 사람들을 연결하여 30~50년 동안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며, 가정을 이루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중요한 사건과 정책이 평생에 걸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단기적 효과에 치중하던 기존 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한다.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제는 경제학자들이 수량적 자료들을 주로 연구한다는 틀마저 깨지고 있다. 텍스트마이닝 기법을 이용하여 풍부한 문서 자료로부터 의미를 추출하고, 문서 간 유사성을 검토하며, 태도와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추적하는 연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과거로 갈수록 통계자료보다는 글로 적힌 자료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역사 연구의 지평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것이다. 어떤 연구는 과거의 악보들을 대상으로 곡의 전개를 데이터화하고, N그램이라는 자연어처리 기법을 응용하여 패턴을 분석, 많은 작곡가들이 스승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결국 자신만의 창의적 음악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눈부신 변화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 불과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테이프와 OCR, 천공카드 등으로 연구하셨던 선배님들의 옛날이야기와 인터넷 시대에서 연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사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듣는 심정으로 라떼 이야기 좀 적당히 하시지를 속으로 되뇌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한순간이겠구나하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파이선부터 각종 기계학습까지 배워야 할 것은 너무 많고, 배운 것은 조금인데 첨단 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화의 흐름에 따라가고자 이처럼 고군분투하는 것은 비록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디지털 기술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일과 삶에 상당한 압박을 준다. 클라우드 바탕의 각종 업무 도구들을 익히는 것도 버겁고, 그것으로 계속 소통해야 하는 것도 피곤한데, 즐기는 것조차 디지털이 아니면 정보도 늦고, 할인도 못 받고, 예약을 못 하거나 상술에 쉽사리 넘어가기도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남들만큼살아가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필자의 경우, 강의를 한다는 것, 누군가와 생각을 교환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디지털의 사슬(?)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식의 저주라고 하던가. 첨단 지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압박 속에 살다 보니, 그저 최신의 것을 최신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의 핵심이라고 착각하는 것. 공부를 하겠다고 온 사람들이니 내가 아는 최소한은 저들도 당연히 알 거라고 가정하는 것. 대학원에서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 역시 그 저주에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이 처한 어려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고는, 화석화된 지식의 일방적 전달에 불과할 뿐이고 그것을 활용해 세상을 바꿀 동기와 용기를 주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감과 이해라는 것은 기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지 않고서는 쉽사리 얻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연구들도 결국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좀 더 나은 방향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그저 흐름을 따라가고 연구를 찍어내는 것이 내가 하고 싶던 것이 아니기도 하고. 학생들, 다시 만난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래서 분명 비용이 드는 일이지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되새기고 또 다듬을 수 있게 한다.
 
학자들은 말했다. 디지털 기술에 대체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디지털 기술로도 대체가 안 되는 능력, 특히 사회적인 능력이 중요해진다고. 나는 두 가지를 다 잘 해보려 아등바등하고 있다. 물론 무엇 하나라도 잘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한번 해보려 한다. 디지털의 도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든, 그 과정 자체가 누군가에게 교훈과 영감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료 정도는 되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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