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네들의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뜻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네.” 연암 박지원의 말씀이다.
경제학자, 교수, 정책설계자, 경제수석, 위원장 등등 그가 맡아온 여러 직위 때문인지 그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이었다. 심지어 키가 180cm를 넘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러한 선입견에 위축된 데다 기관장을 인터뷰이로 만난다는 것이 흔치 않은 만큼 긴장도 됐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반려견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에서 몇 분 만에 사라졌다. KDI 직원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싶다는 ‘소통주의자’ 홍장표 원장을 지난 7월 1일 집무실에서 만났다.
지난 6월 1일 취임하신 지 꼭 한 달이 지났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기도 하고 부서별로 업무를 파악하느라 바쁘셔서 많은 KDI 구성원들과 만나기는 힘드셨을 것 같은데요, 먼저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KDIans』를 통해 여러분들께 인사하게 돼 반갑습니다. 취임한 지 이제 한 달 됐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긴 하지만 KDI의 많은 분들을 만나 뵈려고 노력했어요. 아직 직접 대면하지 못한 분들이 더 많긴 하지만요. 상황이 나아지면 직접 만나서 인사 나누고 싶습니다. 아쉽지만 우선 지면으로라도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올해는 KDI가 개원 50주년을 맞은 시기입니다. 경제학자로서 또 고위 정책결정자로서 KDI를 어떻게 생각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KDI는 경제·사회 부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있다고 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과 정책결정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특히 KDI에서 발표하는 보고서나 연구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KDI가 50주년을 맞은 지금이 일종의 대전환 시대라고 회자되고 있는데, 그만큼 KDI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뜻일 겁니다. 글로벌 경제의 변화 속에서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코로나19 이후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떠할지 KDI가 그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원장님께서 생각하시는 향후 KDI의 역할과 비전도 그 부분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이해하면 될는지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결정자들과 관련 연구기관 사이에 협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도 정책에 관여했었습니다만, 정부는 당장의 현안들이 많기 때문에 거시적인 미래 비전이나 중장기 계획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KDI를 비롯한 많은 연구기관들은 더 멀리 더 크게 내다볼 수 있는 전문가들이 있으니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KDI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26개 연구기관 중 맏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맏형으로서 다른 연구기관에 연구방향을 제시하고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 KDI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협업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취임사에서도 저출산·고령화, 일자리 창출, 사회 양극화 등 시급한 현안에 대한 연구기관 간 협업을 강조하셨습니다. 협업을 중시하시는 배경은 무엇인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성장과 효율, 분배 그리고 지속가능성 모두 중요하지요. 최근 제기되고 있는 공정 이슈도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이를 어떻게 잘 조율할지가 정책 성공의 핵심요소입니다. 만약 정책 수립 이전 연구단계에서 연구기관들 간 협업으로 어떻게 가치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논의된다면 정책 조정이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취임사 중 정책수요자와 정책연구공급자 간 미스매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씀에 일부 언론에서 연구기관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는 시각이라고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너무 어렵게 표현한 것 같아요. 사실 아주 간단한 의미였습니다. 정책수요자는 정부나 청와대가 될 것이고 공급자는 연구기관인데요. 필요가 있을 때 즉, 정책수요가 생겼을 때 정책연구가 공급돼야 하는데 그 부분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정책연구가 적시에 정책수요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사후에 결과가 나오면 연구자들이 어렵게 데이터를 수집하며 분석하고 연구했더라도 그 시차로 인해 정책에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비단 KDI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연구기관들이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물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연구주제 선정 시점부터 결과도출 시점까지 최대 2년이 걸리는 구조 자체가 실제 정책수요 발생 시 적시에 연구결과 공급을 어렵게 하는 것이죠.
KDI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들이 있습니다. 이런 외부평가들로 구성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기도 하는데요, KDIans의 자부심과 긍지를 높이기 위해 갖고 계신 복안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게 마법 같은 비법이 있지는 않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KDI 구성원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일상에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요. 이런 가운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직장이 더 재미있고 구성원들이 긍지를 느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시작일 것 같아요. 우선 연구자들이 고생해서 만든 연구결과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더 넓은 범위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정책수요자들에게 우리 기관이 이런 의미 있는 연구를 했다고 알리면서 연구자와 정책수요자의 가교 역할을 열심히 수행할 예정입니다.
밖에서 보던 KDI 모습과 비교해 실제 와서 보시니 ‘이 부분은 생각했던 것과 정말 다르구나’라고 느끼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마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웃음) 그동안 밖에서 KDI 건물을 볼 때 외관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와 생활해 보니 건축 초기 설계단계에 신경을 더 썼더라면 하는 작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동선이 너무 길고, 구성원 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한 데 비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자체가 제한돼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통’을 매우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소통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신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맞습니다. 저는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한 달간 직원들과 열심히 만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다 만나 뵙지 못해서 가능하면 연구원 내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구성원들과 눈맞춤이라도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식사는 맛있으셨어요?) 외부 일정이 많아서 식당에서 두 번 밥을 먹어봤는데 처음엔 맛있었고 두 번째는 만족도가 조금 떨어졌어요. 세 번째는 어떨지 궁금합니다.(웃음)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여건이 나아지면 여러분들과 차 한 잔이라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소통하고 싶습니다. 연우 분들과도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선배님들 말씀도 듣고 우리 기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코로나19 같은 제약이 있긴 합니다만 반드시 선배님들과 만날 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그간 인터뷰나 칼럼에서 꾸준히 강조하신 ‘사람이 자산’, ‘We are not alone’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원장님 개인의 삶의 철학, 또는 좌우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뚜렷한 좌우명이 있다기보다 살아오면서 보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삶의 태도가 된 것 같습니다. 경제학자로 출발했는데 공직생활도 경험해 보고 지금은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있는 KDI의 구성원이 됐습니다. 삶에는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맞닥뜨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힘들어 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일종의 책무이자 미션이라고 여기며 즐기려고 노력합니다. 주어진 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자주 듣고 공감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그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다 보면 오해했던 부분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소통과 공감이 일상생활뿐 아니라 정책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첫 출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씀하셨듯 학자로서 교수로서 또 공직자로서 여러 역할을 맡으시면서 스트레스도 참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원장님만의 노하우가 있으신지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저만의 확실한 방법이 있었는데요, 바로 운동입니다. 약 15년 정도 배드민턴을 했습니다. 전국 교수 배드민턴대회에 출전해서 우승도 해봤습니다.(웃음) 그런데 배드민턴이 생각보다 과격해요. 오랫동안 계속 하다 보니 관절을 비롯해 몸 이곳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반려견 ‘달콩이’와 아침저녁 산책하는 정도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습니다. 또 일이 많고 아무리 바빠도 토요일 점심은 항상 아내와 같이 식사하고 바닷가 앞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합니다. 부산에서는 가능한 일이죠.(웃음) 바다 앞에서 아내와 함께 한 주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서핑을 구경하는 것, 이것도 제게 큰 힐링입니다.
원장님께서 임기를 마치셨을 때 어떤 원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실까요.
은사님 중 한 분인 변형윤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표현이 있어요. 알프레드 마샬의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입니다. 사실 이것은 경제학도가 지녀야 할 자세로 회자되곤 하는데 저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원장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냉철한 머리는 이미 KDI 모든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으니까요. 따뜻한 마음과 같은 감정들이 실제 정책연구에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구성원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을 때 편하게 찾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는 원장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아직 물리적 제약 등 여러 이유로 잘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그런 자리들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묵묵하게 일하시는 KDI 구성원 여러분 모두에게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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