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治가 죽어야 희망이 삽니다
이진순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한국 경제가 다시 전환점을 맞고 있다. IMF탈출을 선언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각종 경제지표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 체감 경기는 지표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진다. 제2의 위기설도 나돌고 있다. 정부는 구조조정의 조기 마무리를 통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시도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개혁 피로감에 젖어있는 상태다. 2001년 한국 경제의 현주소는 어디이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경향신문 박명훈(朴明勳) 편집국장이 대표적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진순(李鎭淳䞮) 원장을 만나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 전망을 들었다.
이원장은 ‘원칙을 교조적으로 따를 때만 시장경제는 성공할 수 있다’는 하이에크의 말을 인용,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구조조정을 추진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명훈 국장=요란하게 시작됐던 새천년 첫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습니다. 2001년은 21세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경제를 둘러싼 국내외 여건이 밝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원장께서는 올 한해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이진순 원장=올해처럼 경기 전망이 어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기업·금융구조조정의 향방, 대외적으로는 미국 경제의 연착륙 여부 등 불확실한 변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기가 하강국면인 것은 사실이지만 구조조정이 성공한다면 하반기 이후에는 회복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가정 하에서 올해 한국경제는 5% 내외의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는 점입니다. 일시적인 고통을 참고 구조조정을 잘 통과하면 견실한 성장을 충분히 이룰 수 있지만 당장의 고통이 두려워 이를 회피하면 경제는 예상보다 훨씬 악화될 수 있습니다.
▲박국장=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위기론이 팽배합니다. 서민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또다른 형태의 위기까지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이원장=2000년 4ܪ분기부터 경제가 나빠지고 있지만 위기로 빠지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먼저 9백3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과 50%를 밑도 는 단기외채 비율 등 1997년의 외환위기 때와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인플레이션 압력도 크지 않고 경상수지도 흑자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경기 하강을 백업하기 위한 확장적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을 쓸 수 있는 여지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현재의 경기 하강과 구조조정을 감내할 수 있는 충분한 체력을 비축했다고 봅니다. 국내저축이 매년 1백50조원이 넘고 자본시 장 개방으로 해외자본도 원활하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정리되지 않은 1백조원 가량의 기업부실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박국장=성장률이나 물가, 실업률 등 거시경제지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시장의 체감경기는 어느때보다도 냉랭합니다. 지표와 체감경기 의 괴리현상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원장=유가급등과 반도체가격 하락 등으로 대표되는 교역조건의 급속한 악화가 그같은 현상을 부른 주요인입니다. 예컨대 반도체를 수출해 사올 수 있는 원유량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나라 전체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국민들의 구매력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코스닥시장의 대폭락, 대우자동차·현대건설 같은 기업들의 위기, 실직 불안감 등도 체감경기를 나쁘게 하는 요인입니다.
▲박국장=98년 현정권이 들어설 때 경제의 패러다임을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바꿔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지 의문입니다. 개혁의 소리만 요란했던 것 아닙니까.
▲이원장=97년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은 기업들의 과잉 차입과 이를 바탕으로 한 방만한 투자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난 30여년간 정부가 경제를 보호하고 통제해온 관치경제의 소산이었습니다. 무리한 투자를 해서 대박을 터트리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정부가 벌충해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바로 이런 관치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한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대우사태가 우리 경제를 다시 관치경제로 되돌렸습니다. 부실채권을 보상해주고 은행들을 채권펀드에 몰아 넣는 등의 조치는 시장원칙을 저버린 것입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산업은행을 통한 부실기업 회사채 보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원칙을 교조적으로 따를 때만 시장경제는 성공할 수 있고 원칙을 편의주의적으로 저버리면 시장경제는 붕괴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박국장=공적자금만 해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동원됐지만 그 효과는 미미합니다.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면서 밑빠진 독에 물붓기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가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 게 현실입니다.
▲이원장=1차 금융 구조조정은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이 뒤따르지 못해 결국 기업부실이 다시 은행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초래됐습니다.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상한’ 제도 때문에 공적자금이 줄줄이 새 나간 것입니다. 이를 책임져야 할 곳은 채권단입니다. 구조조정은 철저히 법규에 근거해 추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는 법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오면서 스스로 원칙을 흔들었습니다. 시급한 것은 부실 대기업에 대한 처리 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현대건설의 경우 살리기로 했다면 과감하게 살려야 합니다. 대우차도 매각이든 청산이든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고 고합·진도·갑을 등 부실 대기업도 처리를 서둘러야 합니다. 정부는 또 시장경제가 꽃을 피우기 위한 가장 큰 전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박국장=개혁과정에서 우리 경제는 각종 구조적인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양상입니다. 지방은 어느곳 가릴곳 없이 경기가 최악이라며 아우성입니다.
▲이원장=외환위기 이후 빈부차가 커졌지만 최근에는 다소 완화되고 있습니다. 지방경제가 더욱 위축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재 우리 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는 반도체 등의 정보기술(IT) 업종은 주로 수도권에 몰려 있는 반면 사정이 악화된 건설·유통·신발·섬유 등의 업종은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산업에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대구의 섬유산업, 부산의 신발산업을 살리기 위해 밀라노프로젝트니 신발산업 육성이니 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입니다. 지역 특성에 맞고 미래 가치 창출 가능성이 높은 길을 찾아야 합니다.
▲박국장=2차 구조조정 과정에서 파업 등 금융권이 최근 홍역을 앓았습니다. 부실 금융기관을 한덩어리로 묶는 등의 금융 구조조정 방식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원장=외국에서도 부실 금융기관들이 금융지주회사 방식으로 통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금융지주회사 방식의 통합이 불가피하다면 신속한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량은행간 합병은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절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부실 지방은행도 속히 자산·부채 계약이전(P&A) 방식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박국장=IMF사태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고효율 저비용 구조로 전환됐다는 뚜렷한 징후는 없습니다. 21세기에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인가, 한국경제의 장기비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원장=우리가 살길은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정보와 기술에서 크게 부족합니다. 따라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선진 기업을 최대한 유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에 우리나라를 동북아 시장의 거점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화된 문화를 갖춰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촌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으로는 외국 기업 을 유치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5년이 중요합니다. 국내에서 아귀다툼만 한다면 3류국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정부나 국민 모두 팔을 걷어붙여야 할 시기입니다.
달라지는 국책연구소 KDI
“우리는 집현전의 후예라고 생각합니다. 목을 걸고 정도를 걷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국내 대표적인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요즘 변하고 있다.
국책기관으로 단순히 정부 정책을 옹호하고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비판으로 정부 경제 관료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지난달 초 KDI는 정부의 기업·금융구조조정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1ܩ기업 퇴출조치를 ‘몰아치기’식이라고 지적하고 현행 구조조정 정책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촉구했다. 이는 1971년 설립된 이후 정부 경제정책의 입안 및 집행 과정에서 자문역할을 수행해오던 KDI가 제 목소리를 내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에 대해 이진순 원장은 “나를 비롯해 KDI 연구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며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원장은 개각 때마다 단골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으며 ‘DJ노믹스’의 설계자 중 한명이다. 특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싱크탱크로 불리는 ‘중경회(中經會)’의 멤버로도 유명하다. 중경회는 김대통령의 ‘대중경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모임으로 지난 92년 대선때 출범했다.
◇李원장 약력
▲1950년 전남 나주생
▲1971년 광주제일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75~82년 한국산업은행 조사역
▲1986년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원 졸업, 경제학박사
▲1986~88년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팀장
▲1988~98년 숭실대 경제학과 교
수
▲1995~96년 미국 하버드대 부설 ITP 및 링컨연구소 객원 연구원
▲1998년 3월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2001/0101 경향신문 9면> [신년대담]官治가 죽어야 희망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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