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연설문 전문)

오늘 이 뜻깊은 행사의 기조연설을 맡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며, 초청해 주신 한국국제경제 학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행사의 주제인 부채문제는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지목 되고 있습니다. 부채의 정의에 따라 통계상 차이는 있습니다만, 여타 선진경제에 비해 우리 경제의 부채 부담이 상당히 높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도시국가를 제외한 OECD 30개 국가 중 우리 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4위, 가계부채와 기업부채의 합의 비율은 3위로 나타납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거의 존재가 미미했던 가계부채가 빠르게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수 선진국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de-leveraging 을 겪지 않고 지속적으로 증가해 오기만 하였습니다.
부채는 주식과 달리 명목상 재정부담이 고정되어 있어, 예상하지 못한 부정적 충격에 대해 경제 주체들이 신축적으로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부채는 경제의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등 많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부채 총량에만 의존한 기계적인 해석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민스키 모멘트’와 같은 개념이 금융시장 이해에 유용한 직관을 제공하기는 합니 다만, 사전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임계점(threshold level)을 찾기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채 총량만을 기준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다른 여건이 동일할 경우’ 높은 부채 총량이 한 경제의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임은 분명하지만, 총량 이외의 여타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Broadbent의 논점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에 네덜란드의 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미국의 2배를 상회하였습니다만, 위기의 충격은 미국에 비해 미미한 수준에 그쳤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Broadbent는 부채의 총량보다 부채의 증가 속도가 위기의 정도를 확대시키는 요인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턴은 총량 자료가 아니라 개인 단위의 부채와 위기 시 충격을 분석한 연구들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03년에 발생한 이른바 ‘크레딧 카드 버블’ 위기 입니다. 당시의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현재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습니다만, 2001~2002년에 급증한 카드론, 즉 가계대출이 부실화되면서 2003년 금융시장이 큰 혼란을 겪었으며, 가계의 재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민간소비의 2년 연속 감소라는 우리 경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부채의 질이 부채의 양만큼이나, 혹은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분석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급증하는 부채는 통상 면밀한 대출심사와 병행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채가 급증하는 기간은 아마도 건전성이 담보되지 못한 대출의 비중이 높아지는 기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령 부채의 수준이 낮더라도 그 질이 좋지 못하면, 작은 충격도 큰 위기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역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보다 최근 우리의 소득 대비 가계대출 비율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가계 대출이 비교적 신용도가 높은 가계에 의한 대출이었다는 점이, 우리가 대규모 금융위기를 겪지 않도록 버티게 해주는 주요 원인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나라 부채의 리스크를 평가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측면은 정부의 개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2010년대 중반 이후 가계부채가 크게 증가한 배경에는 급속히 확대된 공적 금융 기관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이 기간 동안 주택금융공사나 주택도시보증공사 (HUG)와 같은 공공기관의 보증을 통한 전세자금대출, HUG의 대출, 그리고 주택금융공사 정책 모기지(적격대출 + 보금자리론)의 합을 ‘공적지원 대출’로 정의할 때, 가계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9%에서 2022년 18%대로 확대되었습니다. 절대금액으로 보자면 2015년 113조원에서 불과 7년만에 327조원으로 거의 3배 가량 증가한 것입니다. 공적지원 대출을 제외한 일반 대출의 증가율은 연 평균 5%를 하회하고 있어, 명목 GDP 증가율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만일 2015년 이후 공적지원이 급증하지 않았더라면 GDP 대비 가계대출 비율이 증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 대목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2022년 금리가 상승하면서 일반 가계대출은 20조원 가량 감소한 반면 공적지원 대출은 여전히 13조원 증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공공기관 보증과 연관된 부채들은 충격의 파급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순수한 민간 부채와 구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공공기관의 보증을 받은 민간 부채가 부실화될 경우, 그 부담은 궁극적으로 민간보다는 정부로 귀결된다는 측면에서 민간 금융 시장으로의 부정적 영향 확산은 상대적으로 억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효과의 이면 에는 결코 작지 않은 사회적 비용이 존재합니다. 시중 은행의 입장에서는 공공기관 보증이 첨부된 대출의 건전성을 꼼꼼히 살펴야 할 이유가 많지 않고, 보증의 양적 확대가 기관의 ‘업적’으로 인식 되는 공공기관의 입장에서도 보증심사를 면밀하게 진행해야 할 인센티브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보다 쉽게 대출을 늘릴 수 있고, 또 늘리는게 유리한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이는 가계 금융이 사회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수준을 상회하여 확대될 가능성을 높이며, 그러한 정책을 지속한 결과 오늘날 우리 경제의 이른바 ‘과잉 부채’ 문제가 잉태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공공기관의 보증 확대는 부정적 충격 발생 시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의 혼란을 완충할 수 있을지 모르나, 금융시장 전반의 중장기적인 효율성 저하와 부채의 ‘과잉 팽창’이라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공공기관의 보증은 상당 부분 경제논리보다 서민대책의 차원에서 추진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서민’의 정의가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서 진행된 이러한 정책들은, 그 대상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어 오늘날 우리가 우려하는 가계부채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가계부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요즘 상대적으로 덜 거론되기는 하지만, 우리 경제의 기업부채도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대기업에 대한 부실대출은 이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크게 개선되었으나,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은 오히려 더 빠르게 증가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여타 선진국을 압도할 정도로 광범위한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금융시장 충격의 단기적 파급을 완충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중장기적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성 저하와 중소기업의 부채의존성 증대 라는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적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중소기업’은 어떻게 정의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금융지원은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금융이 기본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동태적 차원의 경제 행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금융지원은 현재의 재정부담을 미래로 이연시키는 정책일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이슈입니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차입자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 7~8 년간 공격적으로 추진되었던 HUG의 보증 지원이, 최근 전세시장 동요에 이어 결국 수조 원대의 금융부실 부담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사실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장의 재정부담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정부의 금융지원이 지나치게 확대되었던 것은 아닌지 평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의 정부부채 비율이 여타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사실을 들어, 정부의 미래 부채부담을 늘리는 데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를 견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례없는 저출산과 고령화 속도를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재정에 대해 그리 낙관적 생각을 할 수만은 없습니다. KDI 내부의 추산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050년에 100%를 상회하고, 이후 에도 빠른 속도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만일 연금제도를 개혁하지 못하고 그 부족분을 정부부채로 충당하기 시작한다면, 2070년경에는 250% 이상으로 급등할 것으로 추산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추산은 우리가 향후 연금개혁과 재정지출 구조조정 등을 어떻게 추진해 나갈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가 국가재정 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 변화의 영향이 보다 극적으로 나타날 장기 시계에서 바라볼 때, 저는 개인적으로 가계나 기업의 민간부채보다 정부부채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출산· 고령화가 민간부채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근거는 뚜렷 하지 않은 반면, 정부부채는 인구구조 변화에 결정적으로 의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과다한 민간부채 문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수년간의 경기침체라는 큰 고통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만, 결국 시장의 힘에 의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구조조정을 통해 정리될 수 있는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다한 정부부채는 정부의 파산 리스크로 이어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가의 주권문제로 비화될 여지도 있다는 점에서, 민간부채 문제보다 잠재적으로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가 망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경제위기가 발생해서 많은 기업이 파산하고 자산가격이 폭락했던 1997~1998년 외환위기 시기와 같은 경우를 염두에 두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 때에도 우리나라는 1년여 만에 용수철처럼 회복 했습니다. 건전하게 관리해 왔던 정부의 재정이 큰 밑받침이 되었던 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한 나라의 정부가 파산하는 경우가 “나라가 망한다”는 의미에 보다 가깝 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부채가 외채에 의존하지 않아 나라의 주권은 보전한다고 하더라도, 납세자 이며 채권자인 국민과, 채무자인 정부의 채무재조정 과정에서 경제를 지탱해줄 부문은 거의 존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개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점에서 정부부채 문제를 과대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개혁을 지체하는 데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개혁의 시급성만큼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 예로, 연금개혁이 1년 지체될 때 발생하는 추가적 부담은 수십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처럼 우리 경제를 이해하고 장래를 내다보는 과정에서 부채 문제는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주요 단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채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 부문별 부채의 유사점과 상이점, 부채가 증가하게 된 원인과 이를 제어하기 위한 올바른 정책 방향 등, 논의해야 할 이슈가 너무도 많습니다. 부디 오늘의 학술행사가 이처럼 복잡다기한 우리나라의 부채문제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오늘 제 기조연설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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