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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쉽게 풀어쓴 경제사]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매일경제신문 2007.06.20

[쉽게 풀어쓴 경제사]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김두얼 KDI 연구위원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시적 묘사로 시작되는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시골 장터를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아마도 물건 사는 것을 `마트에 간다`거나 `슈퍼에 간다`고 표현할 대도시 청소년들에게 닷새마다 열리는 시골장터 모습은 책이나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다소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설혹 오일장이 서는 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의 경우에도 요즘에는 상설시장이 많이 늘어 이효석이 묘사하는 여름 장날 오후의 쓸쓸한 정취를 느끼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며칠에 한번씩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교환하는 정기시(定期市)는 오랜 세월 동안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달해 왔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거래 형태인 물물교환의 속성을 고려해보면 정기시가 발달한 이유는 비교적 쉽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정기시와 같은 자리가 없다면,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그 물건을 소유한 사람을 찾아 가가호호 방문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든 사람이 만나 내다팔 물건들을 서로 내놓고 교환을 하게 되면 이러한 불편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아예 물건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 상설점포를 운영함으로써 정해진 시간에만 교환하는 데 따른 번거로움까지 제거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널리 흩어져 사는 농촌지역에서는 수요 부족으로 유지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정기시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부터 여러 형태의 시장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장시가 형성된 것은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따르면 1770년께 전국에 걸쳐 약 1064개의 장시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와 있고 다른 기록 역시 비슷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000여 개의 장시가 존재했다는 것은 장시들이 지리적으로 매우 조밀하게 분포했음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동국문헌비고`에는 전라도에 214개의 장시가 있어서 한 읍에 평균 4개의 장이 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농민들이 대개 자기 집에서 가까운 두세 군데 장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갈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들 장들은 하나가 1, 6일에 열리면 인근 다른 장은 2, 7일 혹은 3, 8일 하는 식으로 시차를 두고 열렸기 때문에 정기시가 안고 있는 시간적 제약이라는 한계 역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많은 장이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 장들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거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 상인이 생겨났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등장 인물인 허생원이나 동이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지요. 흔히 행상, 장돌뱅이, 혹은 보부상이라 불렸던 이와 같은 상인들이 장이 파하면 무거운 짐을 나귀에 싣거나 아니면 직접 지고 밤을 새워 그 다음 장터로 몇 십리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니었는데, 소설은 바로 이 모습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장돌뱅이들은 싸게 팔리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사서 물건이 귀한 곳에 가서 비싸게 팔아 이문을 남겼습니다. 전통 사회에서는 이것을 부정직한 행위로 보는 부정적인 견해가 강했지만, 이들이 취한 이득은 대부분 노동 대가와 위험부담을 안은 데 대한 보상으로 설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몇 십리씩 떨어진 여러 장터를 옮겨 다니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이동 중에 맹수라든가 도적을 만나 몸이 상하고 물건을 잃어버릴 위험도 적지 않았습니다(우리나라의 전래 설화들에 이러한 내용을 소재로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지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장에 도착하더라도 물건이 제값을 받고 팔리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일 비싼 가격이 상인들간의 결탁에 의해 인위적으로 높게 결정된 것이라면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수많은 상인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터에서 담합이 유지되는 것을 상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장돌뱅이들은 물자가 남아도는 지역에서 물자가 모자라는 지역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소비자 후생을 증대시키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했던 `보이지 않는 손`을 구현했던 셈이지요.

장시에서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습니다. 농민들은 쌀이나 가축 혹은 간단한 수공업품들을 들고 나와 서로 교환하거나, 혹은 철제 농기구나 소금처럼 일반 농가에서 쉽게 생산하지 못하는 제품들을 구매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농민들이 장시에 나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화폐를 얻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금을 낸다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전근대사회에서 장시는 바로 화폐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많은 어르신들은 아직도 `쌀 팔아 돈 산다`는 표현에 익숙하신데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은 이러한 관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8세기까지 증가하던 장시는 19세기 동안 다소 감소하지만,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증가하기 시작해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38년에는 1458개소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복 이후 남한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어서 70년대 초만 해도 남한지역 장시 수는 1000여 개를 헤아렸습니다. 하지만 장시는 80~90년대를 지나면서 빠르게 감소했는데요. 한국정기시중앙회에 따르면 현재는 528개의 오일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오일장 쇠퇴는 경제구조 변화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인구 비율이 크게 증가했고, 농산품이나 공산품의 생산, 유통방식 자체가 오일장과는 맞지 않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울러 교통 발달과 농촌 소득 증가 등으로 인해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인근 도시에 나와 물건을 구입하는 게 용이해진 것도 오일장을 찾는 사람이 줄어든 중요한 원인입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오일장 쇠퇴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장터의 정겨운 풍물과 정취는 문학 작품 속에 흔적만을 남긴 채 장터들과 함께 스러져갈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편리함과 신속함 등을 얻으면서 치르는 대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너무 마음 아파하고 되돌리려 노력하기보다는 마트나 슈퍼마켓을 둘러싼 서민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것을 진솔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해줄 우리 시대 작가를 기대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2007년 6월 20일 매일경제신문 B4면 [쉽게 풀어쓴 경제사]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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