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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 [fn시론] IT기술에 밀려나는 라디오

파이낸셜뉴스 원고 2006.10.17

[fn시론] IT기술에 밀려나는 라디오

김동률 KDI 부연구위원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비둘기호’라는 열차가 있었다.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서는 완행열차다. 속도가 매우 느려 간혹 날쌘 청년들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리거나 올라타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 열차는 더 고급인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만나면 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역에 멈춰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싼 운임 내고 탄 설움을 톡톡히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느리고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에는 이웃한 도시 학교로 통학하던 청소년들의 설렘과 재잘거림이 담겨 있었고 삶은 달걀과 푸성귀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 아들, 딸 집으로 가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있었고 5일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들고 새벽 첫차를 탄 장꾼들이 있었다. 비둘기호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리 이웃이었다.

KTX가 오히려 서민 발 묶어

비둘기호가 어느날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운행할수록 적자만 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른바 경영논리에 따른 강제퇴출, 비둘기호를 없애고 철도공사의 재정이 얼마나 튼튼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둘기호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타야 했다. 그러던 가운데 통일호마저 2년 전 없어졌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새마을호보다 훨씬 빠른 KTX가 나타났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KTX를 이용한다.

그러나 모두가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기름과 찹쌀 자루를 걸머진 할머니나 지방장터를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은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 없다. 깨끗하고 쾌적한 KTX가 오히려 서민들의 발을 묶어 버린 셈이다. 기술 발전과 경제논리가 기차간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라디오는 정말 흔하디 흔한 매체다. 자동차를 사면 그냥 거기에 붙어 나오고 콤팩트디스크(CD) 플레이어를 사면 원하지 않더라도 라디오는 거저 딸려 나온다. 어느 누구도 라디오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따로 사지는 않지만 라디오는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 가장 보편적 매체인 동시에 상대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매체다. 벼룩시장에서, 미싱이 돌아가는 봉제공장에서, 잠든 아파트를 지키는 경비실에서, 인터넷에 익숙지 않은 노인들 옆에서, 첨단기계가 어려운 장애인들 옆에서 라디오는 아직도 가장 사랑받는 매체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열차가 비둘기호에서 통일호, 새마을호, 그리고 KTX로 발전했듯이 라디오도 MP3와 인터넷으로 진화하더니 마침내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으로 나아갔다. 이 와중에 원래는 라디오를 디지털화하기 위해 준비하던 주파수마저 DMB에 빼앗겨버려 라디오는 언제 디지털의 옷을 입게 될 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관련 부처인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는 라디오에 별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추세대로 간다면 자동차에 거저 부착돼 나오던 라디오마저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수많은 오디오 채널을 가진 DMB가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라디오는 들으려고 해도 주변에 찾아보기 힘들며 점차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아날로그로 남아 있는 한 피하기 어려운 퇴출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DMB등장에 '공공재' 사라지나

라디오가 사라진다면 라디오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무엇을 듣게 될까. 라디오에 소개되는 그 많은 사람의 사연은 앞으로도 계속될까. 곤고한 서민들의 경우 매달 상당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고 단말기 비용도 만만치 않은 DMB폰을 구입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비둘기호에서 강제로 밀려났듯이 이 땅의 진짜 서민들이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때문에 그들과 동고동락해 온 매체마저 빼앗기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미디어 이론중에 개발이론(Development Theory)이라는 게 있다. 미디어가 국가 경제개발에 한몫한다는 이론이다. 돌이켜 보더라도 우리 앞세대들은 라디오를 통해 영농기술을 익혔으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런만큼 라디오는 공공재인 성격을 띠고 있다. 라디오를 단순히 경영 논리나 산업논리로만 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중 하나다. ‘라디오 스타’란 영화가 소리없이 뜨고 있다고 한다. 영화도 물론 훌륭했겠지만 아마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과 사랑, 연민도 이 영화가 뜨는 데 한몫했을 게다. 이 가을에는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해 한번쯤 고개를 숙여봐야겠다.

10월 17일 파이낸셜뉴스 23면 IT기술에 밀려나는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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