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SUNDAY 오피니언 [선데이 칼럼]
2025년 8월 18일 백악관에서 열린 미·유럽 정상회담 사진 한 장은 꽤 상징적이다. 7~8명의 유럽 정상들이 나란히 앉아 중후한 책상 건너편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훈시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이 사진을 두고 미국 대통령의 오만함을 비판하거나 백악관의 외교적 결례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다른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어쩌다 유럽의 위상이 이렇게 되었을까?
1995년까지만 해도 유로존 20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7조6000억 달러 수준으로 미국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2025년에 미국 GDP는 30조 달러를 넘어선 반면 유로존은 17조 달러 내외에 머물렀다. 한 세대 만에 상대적 경제 규모가 거의 절반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몇몇 일화가 떠오른다. 파리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의는 오전 3시간, 점심 2시간, 오후 3시간이 통상적 일정이다. 긴 점심시간 동안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햄버거 먹으며 바쁘게 일하는 미국인을 조롱하는 농담이 종종 등장했다. 인간다운 우아한 삶이 아니라는 취지다. 실제 2024년 미국 근로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1800시간 정도인데 프랑스 1500시간, 독일 1330시간에 불과하니, 유럽 근로자는 미국 근로자보다 20~25% 덜 일하는 셈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동시통역사 분과의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프리랜서라 연말에 소득이 집계되어야 세금이 부과되는데, 다음 해 1월부터 7월까지의 소득은 모두 세금 및 기타 부담금으로 납부하고 나머지 5개월의 수입으로 1년을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공식 통계로도 프랑스 전체의 세금·부담금이 GDP의 45%에 이르니 평균 이상의 소득을 누리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그럴 것 같은 이야기다. 프랑스뿐 아니라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서유럽 주요국의 국민부담률은 대부분 40%를 상회한다. 미국은 25% 정도로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편이다.
그 외에도 차이점은 많다. 유럽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소득재분배 정책을 시행할 뿐 아니라 시장에도 깊숙이 간여한다. 전통적으로 사인(私人)간 계약을 존중하는 미국에서는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워 기업이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데 유리하다. 반면 유럽에서는 노동자 권익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강조되며 다양한 규제가 적용된다.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해서도 미국은 규제를 최소화하여 민간의 창의를 지원하는 반면 유럽은 AI 기술의 잠재적 위험에 초점을 맞추어 촘촘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이 당장은 더 안락한 삶을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혁신과 성장을 견인하기는 어렵다. 잘살기 위해 더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성과를 올려도 소득의 절반 이상을 정부에 납부해야 한다면 열심히 노력할 이유는 줄어든다. 사실 소득의 절반이 세금이라면 절반의 사회주의라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자며 개인의 노력과 성과를 그들에 대한 보상과 완전히 분리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원인을 되새길 만하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유럽의 격차 확대는 이러한 경제 시스템 차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애플·구글·테슬라·엔비디아 등 그동안 나타난 글로벌 혁신 기업들이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다는 사실 역시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AI로 대표되는 미래 산업 경쟁력에서도 유럽과 미국의 격차는 확대일로다.
우리나라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2010년까지도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에 육박했으나 2024년 1865시간까지 빠르게 감소하였다. 연평균 25시간 가까이 줄어드는 추세이니 이제 3~4년 뒤에는 미국보다 노동시간이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국민부담률 역시 지난 10년간 빠르게 상승해 이제는 20%대 중반인 미국을 넘어서고 있다. 노동시장도 기업활동의 자유보다는 노동자 권익 보호가 강조되며 경직화되어 왔다.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경제 시스템은 미국형에서 점차 유럽형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진행된 지난 10~20년 동안 우리 성장률은 2% 이하로 둔화했고, 그 결과 미국의 8~9% 수준까지 상승해 오던 우리 GDP는 2010년대 중반 이후 그 추세가 반전되어 최근 6%대까지 하락하였다.
어떤 시스템을 선택할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이제 우리도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여유롭게 주변을 돌아보며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자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선택이 미래의 ‘더 인간다운 삶’을 가꾸어 가는데 전혀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포퓰리즘적 내러티브에 현혹되지는 않으면 좋겠다.
오늘 공부하지 않아도 내일 성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별반 나아지는 게 없으면 애초에 공부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는 점은 더 심각한 문제다. 우리 자녀들이 앞으로 어떤 세상에 살게 될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그리고 30년 뒤 우리나라 정상이 백악관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궁금해진다.

조동철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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